펴자는 것이었다.) // <아언각비> 3권 : 시문잡저
등의 저작을 내놓는다. 또한 회갑을 맞아서는 자서전적 기록인「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하고 자연을 유람하며 말년을 보내다가 75세의 일기로 숨을 거둔다.
자찬묘지명에서 다산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돌아보며 경계했다.
시 이들 성호학맥의 후학들 사이에 성호의 학문을 학습하고 조술하는 학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산은 10세때 서울에 머물면서 이들 성호학맥의 후학들을 따라 성호의 유고(遺稿)를 읽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학문에 뜻을 세웠다 한다. 정약용이 뒷날 제자나 조카들에게 “나의 큰 꿈은 성호를 따라 사숙
유배기(1801~18년), 귀향기(1818~36년)로 구분할 수 있다. 정옥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P. 296~297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으며 후에 권철선(남인 학자로 실학사상의 시조인 성호이익의 제자) 밑에서 한동안 공부하였다.
열다섯 살에 둘째 형 정약전의 친구 이승훈의 일가인 이
시아 봉건국가의 붕괴과정과 자본주의 맹아형태’ 및 ‘이데올로기 발전의 총과정’ 등을 연구 과제로 들고 ‘학문의 발전은 … 무엇보다도 사회경제의 역사적 발전과 내면적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근세 조선사상(近世 朝鮮思想)에서의 유형원, 이익, 이수광, 정약용, 서유구, 박지원 등 현실학파(現實學
1. 소품문(小品文)으로서의 척독산문
1.1. 조선후기 소품문(小品文)의 유행
조선후기는 산문(散文) 문체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온 시기였다. 기존의 조선사회는 중세문화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적 가치를 담고 있는 고문(古文)을 중시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당송고문(唐
시대의 질곡을 감안 한다면, 웃음과 해학과 풍자가 곁들인 그의 소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삶의 위안과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인상 깊었던 「문장」
“산골의 가을은 왜 이리 고적할까! 앞뒤 울타리에서 부수수 하고 떨잎은 진다. 바로 그것이 귀밑에서
생애가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 있어 동일하게 적용되고, 자신의 내면을 발견해 자기완성을 시킨다는 것이 생을 살아감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깨닫게 해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너무 자기 내면만 완성시키는 것에 치중하지 않고, 근래에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
정약용에게 편지란 ‘세상과 통하는 단 하나의 통로’로써 유배생활에서 오는 아픔을 달래고 위로받기 위한 정서 교감의 장(場), 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자식들에게 보낸편지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 특히 아내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어 ‘아버지’이자 ‘남편’, 한 가정의 ‘
다산이 두 살 되던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산은 성호의 길을 접하고 학문을 굳히게 되었다. 그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벼슬살이하던 득의의 시절이요, 제2기는 귀양살이 하던 환난시절이요, 제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이